2020
그녀의 낙서_Home
최양희展 / CHOIYANGHEE / 崔陽喜 / painting 2020_0415 ▶︎ 2020_0425 / 월요일 휴관
최양희_A Wheel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8×91cm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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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자작나무 사간점GALLERY WHITE BIRCH SAGAN-DONG서울 종로구 사간동 36번지Tel. +82.(0)2.733.7944www.galleryjjnamu.com
낙서와 회화의 층위 ● 어떤 대상을 두고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시각적 감동은 제작방식 여하에 달려 있지 않다. 작가가 철저하게 계획하고 그에 따른 방식으로 공들여 그린 것이든, 작가의 무심한 손에 의해 긁적거리다 만들어진 것이든, 즉 유심이든 무심이든 상관 없다. 아니면 다시 말해 애초에 결과가 예상된 것이든 과정에 따라 그 결과가 예상 밖의 것이든 시신경을 자극하는 미적 질서가 있을 때 공히 감동적이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대면하고 있는 작품들은 어찌 보면 지극히 섬세하게 계획되어 그려진 유심 그 자체이고 어찌 보면 무심히, 소희 말해서 생각 없이 연속하여 긁적거린 결과물이기도 하다. 하여 모순되게도 그림은 관념적이면서도 때론 직관적이다. 어쩌면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불안정한 접점의 상태로 보이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 최양희는 그림은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생각은 일관되지 않고 언뜻언뜻 단속적이다. 다시 말해 무엇을 그릴 것에 대해서는 생각에 의존하지만 그리는 과정은 너무도 단순하게 손의 의지내지는 행위에 이끌린다는 것이겠다. 우선 연작 「사운드 셀(Sound Cell)」은 카오스에 가깝다. 그러나 이 카오스는 흔히 생각하듯 코스모스의 반대이거나 무질서가 아니다. 카오스는 오히려 우리가 잃고 있던 원초성에 대한 환기 혹은 정수 찾기이다. 때로는 막무가내로 휘갈긴, 때로는 서툴게 그은 것 같은 선은 원초적인 몸짓과도 같다. 또한 그 흔적이 증명하는 것은 어떠한 회화적 예기에 대한 부담으로부터도 벗어나고자 하는 몸짓이기도 하다. 까닭에 그것은 무의미와 비의도의 표현이다. 여기서 무의미와 비의도는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종이 한 구석에서 발견하게 되는 무심한 손동작의 흔적이다. 이 흔적은 불규칙하고 세련미와는 관계가 없지만 억지의 서투름도 없는 무결의 상태이다. 따라서 형(form)/지시(reference)에는 결손이 있을지 모르나 그 무의미의 의미에는 결여됨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역설에도 불구하고 그의 화면에는 생산자와 감상자 사이에 공유하는 여백이 존재할 뿐 어떤 긴장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이 여백의 유혹이 작가의 독자적 공간이라기보다는 감상자의 몫으로도 여겨지는 것은 애초부터 무엇을, 어떻게, 잘 그려보겠다는 의지가 없이 무참히 내던져지고 휘둘린 것 같은 선을 통하여 감상자에게 공모의 충동을 불러 일으키고 그려진 대상과 회화의 본질과 그 이면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또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는 의의에는 변함이 없다. 작가는 의도하지 않더라도, 화면은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생산의 주체로서의 작가와 감상자는 동일한 벽면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의 실체가 바로 최양희의 낙서이자 회화 공간이다. 반면에 일상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대상들- 「바퀴」, 「나무」, 「기린」 등을 묘사한 연작들은 낙서화가 그려지는 거리의 벽과는 다르게 너무나 깔끔하게 단색조로 채색된 배경과, 그린 대상들 역시 매끈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 낙서라기보다는 팝 아트에 가깝다는 인상이다. 물론 몇몇 작품에서 약간은 가장된 우연의 얼룩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다소 의견이 분분하지만 거리의 낙서화가 팝 아트의 분류 중의 하나이니, 앞서 제시된 마구 휘갈긴 것 같은 '사운드 셀' 작품과의 간극이 그리 크다고 할 수는 없겠다. 사실 낙서화는 간단한 스크래치 표현에서부터 정교한 벽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가 포함될 수 있다. 애초에 거리에서 생겨나서 일정 기간 유지하다가 사라지는 낙서화는 그 공간적 태생적 한계 때문에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걸리는 제도적인 미술과 구분 되었지만, 특히 에어로졸 스프레이. 스텐실 기법 등을 사용한 그라피티(graffitti)는 회화의 영역을 넘어 중요 갤러리와 미술관의 점령군이 된지 이미 오래다. 그러니 회화이건 낙서이건 굳이 따질 일이 아니다. 그라피티는 또한 사회, 정치 나아가 미술 자체의 비판적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매우 적절하게 쓰이기도 한다. 낙서화는 당연히 균형, 평정, 침묵 따위의 고상함과도 거리가 있다. 이와 같이, 작가 최양희의 두께 없는 대상을 직시하면서 관객이 얻은 지각과 인식의 불편한 지층, 그것이 낳은 해석의 폭은 넓고도 다양하다. 그러한 까닭은 무엇보다 그의 팝아트와 초현실주의적 회화가 믹스되어 잉태한 이미지가 연상하게 만드는 가공된 대중성과 얼룩 같은 효과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작가 최양희는 이번 개인전의 대 명제로 『그녀의 낙서』로 내세우길 원했다. 왜 작가는 굳이 자신의 작품을 '낙서'와 등가물로 위치시키고자 하는 것일까? 아마도 작품의 시원에 중점을 둔 표현일께다. 물론 답은 그림 속에 있다.
최양희_Tre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8×91cm_2019
최양희_Giraff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8×91cm_2018
이번 전시작품의 첫 인상은 그러했다. 허나 자신을 드러내기에는 너무 허약해 보이는 존재감, 공간을 점유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가벼움, 2차원의 범주에도 속하기를 머뭇거리는 덩어리 같지 않은 덩어리, 그럼에도 모질고 질기게도 얽히고설켜 살아가야만 하는 세상의 인연처럼 최양희의 대상들은 결핍의 신체를 외곽의 유사와 홀씨에 의탁하며 삶을 타진한다. 하여 그것은 공간에 그린 드로잉처럼 보이거나 혹은 허상인 그림자 같은 외곽을 통하여 자신의 위상을 정립하려는 불완전한 존재로도 보인다. 실제로 그것은 그림자를 통해 그 실체를 확인하는 것이 더 용이할 때도 있다. 그림자는 존재의 일그러진 이미지일 뿐 존재판단의 절대명제가 될 수 없음에도 그 관계는 역전된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작가가 허구와 허상인 예술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더 드러내듯이, 가벼운 존재와 그 그림자의 관계를 엮어 우리의 고착된 시각을 반성케 하려는 의도로도 보인다. 최양희의 화면에는 온갖 동식물과 사물의 체용과 기록, 그리고 가역적인 시간의 기억이 상상력과 맞물려 깃들어 있다. 그것들은 우리 주변의 일상용품이거나 흔히 쓰는 도구, 익히 알고 있는 동물이거나 혹은 이도 저도 아니면 뜻 모를 붓질이거나 얼룩이다. 바퀴, 백조, 나무, 기린, 말, 해바라기, 램프, 방패, 성, 집, 인체 등등의 모든 사물과 생물이 망라되어 있을 뿐 아니라 색채와 소리 그리고 어느 날, 새벽, 처음 등의 상황에 까지 이른다. 더 나아가 '항상 기뻐하리!'라는 아포리즘도 개입한다. 이쯤 되면 작가가 다루고자 하지 않는 소재가 무엇일까 궁금할 정도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개체의 다양성만큼이나 다소 왜곡내지는 과장되거나 은근히 은폐되어 실체를 명확히 드러내지도 않는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 궁금증에 대한 해답은 아마도 그가 어떤 특정한 소재에 집착하지 않을뿐더러 소재가 작품의 절대적 요소가 아니라는 뜻일 게다. 어찌 보면 최양희에게 있어 이 세상 만물이 작품의 소재가 될 수 있음이다. 요컨대 대상의 구체성을 파악하기 어렵더라도 단지 사물인 회화를 통해 우리는 그 대상의 됨됨이와 위상 그리고 시대를 추상해내듯이 말이다. 성급하게 결론짓자면 이렇듯 최양희의 작품은 세상 만물을 통해 본 세계에 관한 낙서이자 내러티브이다. ● 형태의 외곽만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겨우 유지하고 있는 대상들을 유심히 관찰하자. 예컨대 작품 『문』에서 문이라고 느낄 형태라고는 덜렁 그것의 외곽만이 기묘한 모습으로 자리한다. 거기에 얼핏 유리를 통해 바깥 풍경이 보이는가 싶지만 의외로 창을 통해서가 아니라 나무 문틀을 통해 보는 풍경이 묘사되어 있고, 홀씨와 얼룩이 뒤섞인 채, 때로는 붉은 색이 밑도 끝도 없이 화면을 가로지른 채, 그런 엉뚱한 형상이 감상자를 화사하지만 불안한 표정으로 응시한다. 작가는 단속적이며 부지불식간에 나타나는 이를 낙서라 이름한다. 그 외곽의 속을 채우고 있는 것은 홀씨들이다. 애초에는 작가가 그저 무의식적으로 긁적거린 선묘에 불과하던 낙서가 어느덧 훌륭한 하나의 홀씨가 되었다. 조금 더 유추해서 본다면, 나아가 그 홀씨는 대상의 삶과 죽음의 경계에 얽힌 낭만주의적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사실 홀씨는 꽃의 주검이지만 동시에 또 다른 삶을 잉태하고 있는 생명의 포자이다. 생명은 지속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하나의 존재가 지속을 멈춘 순간 생명은 끝난다고 할 수 있다. 베르그송은 지속이 한 존재의 실존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인 만큼, 존재의 생존 자체가 지속을 여는 개념인 까닭에 존재가 죽는 순간 지속이란 무의미한 개념이 된다고 했다. 반면, 최양희의 홀씨는 생명을 배태하는 것이기에 지속은 관계에 의해 유지되는 개념이다. 따라서 홀씨는 존재일반보다 존재의 관계성에 주목하는 내러티브가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그의 홀씨는 탄생이 필멸의 죽음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죽음이 또 다른 존재의 탄생을 담보하는 생명의 이행을 역진화하는 표상이 된다. 이 표상은 시공의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성과 관계성들을 함께 아우르기에 혹여 불현듯 그려진 낙서라도 낙서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이든 화면에 함께 공존한다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서로 관계하는 것이다. 결국 현재를 살아가는 어떤 존재는 현재만의 존재가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로 엮인 시간의 그물로 짜인 관계성의 존재임을 홀씨는 또한 밝히고 있다. 홀씨를 또 다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모든 대상이 공히 홀씨로 채워진다는 점이다. 이로써 대상은 정형도 아니요 비정형도 아닌 어떤 꼴이 된다. 그 자체가 의미상 초현실주의를 떠올리게 만든다. 사실 홀씨에게서 삶과 죽음의 유비를 보는 것 자체가 새삼스러운 게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작가는 의도이든 비의도이든 그 자체로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유비적 관계를 호명하여 다시금 방점을 찍는다는데 의의가 있다. 홀씨와 존재와의 유비적 관계는 작가의 매개행위로 인해 또 다른 의미를 취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재설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도 각각의 대상이 갖는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그리고 혹 존재의 '동질성'에 대해서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 여기서 어차피 작가의 비의도라면 그 상징적 의미의 실제 여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여하튼 작가는 홀씨에 빗대어 존재의 생명(문이나 바퀴 등의 무생물과 상황까지를 포함하여)의 다중적이고 다층적이고 다의적인 성질의 동질성을 표상한 것이다. 사실 한갓 바퀴, 펜스 같은 무생물조차 주체와의 관계 여하에 따라 생명을 획득한다. 결국 화면에 그린 대상들은 구실일 뿐이며, 홀씨를 통해 본 생명의 동질성이다. 이렇듯 초현실주의의 얼룩이, 자동기술법이 그러하듯 최양희의 낙서는 의외의 또 다른 관계를 연출하는 특별한 기제가 된다.
최양희_Sunflower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8×91cm_2019
최양희_Green Door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8×91cm_2019
결과론적으로 최양희 작업의 지속된 화두는 실제에 반(反)하는 시지각적 경험이 아닌가 싶다. 작가는 2005년 첫 개인전이래 일상이나 기억의 대상을 낯설게 하기 위한 시간의 '가역적 탐색'과 공간의 '편재'에 대해 천작해 왔다. 본래 시간일반은 과거로 돌이킬 수 없이 순차적으로 미래로만 흘러가는 비가역적인 것이고, 세계의 그 어떤 존재도 동시에 여기 저기에 편재할 수 없다. 가역/편재적인 것이 흥미로운 것은 작가가 비가역적/비편재적 영역을 역전화 하여 사회적 규범이나 일상적 삶의 상투적인 인식을 벗어나고, 그 시공간을 자유로이 유영하는 새로운 시지각의 생생한 날 것을 보기 위함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시공간은 과학이나 이성의 영역이고 회화는 감각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시공의 가역은 대상과 미에 대한 편견과 학습되고 길든 감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선택인 것이다. 게다가 굳이 어떤 지점을 지향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언뜻 보면 그의 화면은 혼란스럽고 대상들 간의 관계도 모호한 이미지로 비춰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종내 그 혼란스러움은 사라지고 그 너머에서 모든 이성적 의도와 집착이 사라진 미적 평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의 화면은 의도한 것이라기보다는 의도되었다는, 일컫자면 어떤 대상들의 출현을 특별히 의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관계도, 특정한 메시지도 담아내려고 애쓰지 않았기 때문에 귀결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다만 의도하지 않은, 일종의 비의도의 의도랄까. 생각이 즉흥적이라기보다는 분절적이고 단속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단속적이어서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는 일이다. 낙서가 그렇듯 그의 그림은 의식적이며 동시에 무의식에 빗대는 것처럼 이중적이고 양가적이다. 2007년에 발표한 「움직이는 방」 연작을 통해서 작가는 감상자로 하여금 일상적 표면의 뒷면에 드러나지 않고 있는 새로운 이미지들을 포착하도록 이끌었다. 이후 지각과 경험에 대한 지속적인 조형적 실험을 거쳐, 2013년 이후 지속적으로 선보인 「움직이는 탑」 연작에서 드러난 도상들을 외연의 관계, 형식의 울타리로부터 해방된 듯 어떤 시공의 질서에도 귀속되지 않는 가역적인 의미작용의 풍경으로 그려냈다. 따라서 이번 전시에서 발견하는 이미지들 역시 크로핑(cropping)하는 과정을 통해 시지각의 가역적 경험이 가져오는 변화에 대한 탐구를 제시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탐구의 연장이라는 측면에서, 최양희가 이번 전시를 통해 제시하고자 하는 미학적 지표는 우리 시지각의 경험 일반을 가역적인 이미지로 상당부분 바꾸고 있다는 점이다. 형식 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작가가 거침없이 휘둘린 붓질을 가졌던 뒤뷔페(Dubuffet)의 시선에 공감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긴 그의 망막에 풍경이, 인물이 그렇게 비췄겠는가 싶다. 이 역시 가역적이다. ● 그렇다면 작가가 화면에 그려낸 것은 대상의 형태나 유사성에 대한 어떤 표현이 아니었다. 그가 그려낸 것은 대상의 본질이었고 그 대상을 지탱하고 있는 다양한 생명의 지속적인 시원이었다. 단지 그 대상을 연상시키는 표현이 있다면 그것과 유사한 외곽의 형태이거나 대상을 암시하는 어떤 뉘앙스일 것이다. 대상은 단지 시각적 미끼일 뿐이며, 작품의 명제 또한 그러한 흐름에 대한 한 예이다. 오늘날 현대 세계가 외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에 몰입하도록 만들기에 그 내적 세계에 관심을 둘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하게 만들지만, 작가는 미적 직관력을 통해 외적 형상 너머 피안을 보고자 하며 그것을 그려내고자 하는 것이다. 재차 밝혔듯이 작가가 이처럼 외형보다는 그 이면의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일상에 대한 연속적인 기억과 순차적 시간이라는 의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거기에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상상력과 조우하는 지점에서, 그 기억의 형상은 가역적인 시공간 속의 대상들이 될 뿐 아니라 비연속적이고 예측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따라서 그의 낙서는 순간순간의 생각이나 느낌, 반전하는 기억을 옮기는 최적의 작업방식이었던 것이다. 낙서와의 정서적 교감은 물질적 세계 너머의 것들에 대해 볼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은 작가의 작업에 영향을 주게 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한 경험은 어린 시절부터 떠올리게 되었던 환영과 환상에 대한 기억과 교차되면서 좀 더 내밀하고 정서적인 영역에 대한 관심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작가가 가역적인 순간과 마주치게 된 지점은 만물을 생동하게 하는 에네르기인 원초성이라는 현상과 마주하게 되었던 지점과 같다. 원초성은 물질 만능의 현대 사회가 간과하는 것이거나 당연시 하지만, 달리 보면 신비스러운 그것은 생명의 근원이자 존재와 존재를 연결해주는 토대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직관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이는 그것이 무엇인가와는 별개로 같이 생명의 동질성을 느끼는 보이지 않는 끈을 연결하고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처럼 작가는 그 생명의 원초성과 동질성에 대해 주목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최양희는 외형의 가시적인 것들에 몰입하기 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들에 눈을 돌려 응시해 볼 것을 권하고 있다.
최양희_The firs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162.2cm_2020
최양희_Landscap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8×91cm_2019
최양희_여러개의 문이 있는 탑-빛. 꽃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72cm_2020
무릇 회화는 색채와 형태를 가진 가시적인 것들 만의 세계는 아니다. 더더욱 작가의 감정이입만의 세계도 아니다. 그 세계는 과거의 각인된 실제와 남겨진 허상, 더불어 아스라하여 가역적인 시간의 기억과 가려진 밑 바탕의 세계이기도 하다. 우리 몸 속에 선조의 유전자가 흐르듯 그 세계는 물(物)의 기억과 작가의 의도와 비의도 내지는 우연이 함께 공존하는 세계이다. 마찬가지로 최양희의 화면은 존재하는 것들만의 세계가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공간이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가시적 대상을 표현한 작품들에서 잘 드러나듯이 작가가 표현한 화면은 호명할 수 있는 이름을 가진 것들의 세계이기보다는 딱히 의미가 없어 보이는 얼룩과 흔적이 되어 버린 것들의 세계를 구현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다시 말해 실제의 대상들이 화면에 존재하는 방식처럼 현재의 그것들이 미래에 존재하게 될 의도되지 않은 내러티브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최양희가 회화에 대한 깊은 페이소스나 의도의 무의미만을 표현하고자 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는 생명이 시간의 역사와 함께 자신의 육신을 산화 하지만 무생물과 죽음, 즉 생명을 다한 이후로도 시간의 역사를 꾸준히 간직한다는 존재성의 패러독스이다. 이는 만물에 깃들어 있다. 최양희는 이를 예리하게 직관하고 파헤치는 작가다. 거기에 삶이, 예술이 있기 때문이다. ■ 유근오
Vol.20200415a | 최양희展 / CHOIYANGHEE / 崔陽喜 / painting